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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은

2019 공로상
2019
Korean Music Awards Winner
winner공로상
태초의 빛처럼, 한국 포크의 여명기에 양희은이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있었다. 김민기의 ‘아침이슬’을 스무살 양희은이 부르지 않았더라면 그 노래가 한 시대의 상징으로 거듭날 수 있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를 양희은이 다시 부르는 순간, 이 노래는 피터 폴 앤 매리가 부른 밥 딜런의 ‘Blowin’ in the Wind’가 됐다. 그 시대의 위대한 젊은 창작자들의 영혼이 진흙이었다면, 양희은의 목소리는 숨결이었다. 그녀가 숨결을 불어 넣어 세상에 뿌린 노래들은 본의아니게 양희은을 하나의 희생양처럼 만들었다. 1973년, 정부는 ‘아침이슬’에 고운 노래상을 수여했다. 이듬해 이 노래는 금지곡이 됐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포함하여 30곡도 하루 아침에 시장과 방송에서 사라졌다. 김민기의 페르소나였다는 이유만으로 감당해야 했던 운명이었을까. 아니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김민기의 곡들이 양희은의 목소리를 타지 않았더라면 제제의 수위는 훨씬 낮았을 것이다. 그만큼 양희은은 한국 최초의 세대 문화였던 70년대 포크 무브먼트의 상징에 다름 아니었다. 양희은의 목소리는 포크 무브먼트 안에만 머물러 있기엔 지나치게 탁월했다. 하나의 시대가 끝나고 그 다음 시대가 올 때 마다 그녀는 늘 새로운 노래로 돌아왔다. 새로운 재능과 함께 돌아오곤 했다. 70년대 중후반, 유신의 끝무렵에는 이주원과 함께 ‘한 사람’ ‘네 꿈을 펼처라’를, 80년대 초반에는 김희갑과 함께 ‘하얀 목련’을 발표했다. 그리고 1991년, 데뷔 20주년을 맞아 오스트리아에서 기타 유학중이던 학생과의 협업을 선보였다. 바로 이병우와 함께 했던 <양희은 1991>이다. 마흔이란 나이의 무게감이 지금보다 훨씬 무거웠던 그 때, 양희은은 자신의 20주년 기념 앨범에서 (다른 가수들이 으레 그러했듯) 가수 생활의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당신의 삶을 음악에 새겼다. 오직 기타 한 대 위에 풀어 놓는 노래는 평탄한 적 없는 개인의 삶이 오롯이 녹아든 성찰의 잠언에 다름 아니었다. 한국에서 결코 시도된적 없는, 그리고 지금도 찾을 수 없는 종류의 어덜트 포크였다. 동년배의 대다수 가수들이 과거에 머물러 있을 때 양희은은 이 앨범을 통해 새로운 현재를 창조해냈다. 그 현재는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들에게 보내는 편지이자 그들의 자식에게 건내는 엽서였다. 그 다음 앨범에서 선보인 ‘내 나이 마흔 살에는’도 마찬가지였다. 그 전의 세대와는 명백히 차별화된 방식으로 양희은은 인생의 늦여름과 초가을을 맞이했다. 당대를 차분히 받아 들이는 양희은의 길은 지금도 끊기지 않는다. 2014년부터 시작한 ‘뜻 밖의 만남’ 프로젝트로 이적, 윤종신, 이상순, 악동뮤지션, 그리고 성시경과 심현보까지 후배들과 호흡을 맞추고 있다. 역시 2014년에 발표한 <2014 양희은>에서는 장미여관 육중완이 쓴 ‘내 생에 가장 아름다운 말’같은 곡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가 재즈 사운드와도 훌륭히 어우러짐을 증명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늘 당대이자 현재의 언어와 소리로 구현되곤 했다. 2016년 11월 26일, 광화문 광장이 촛불로 뒤덮였을 때 양희은은 조용히 무대로 올라와 ‘아침 이슬’ ‘상록수’를 부르고 내려갔다. 그것은 ‘거장’ ‘디바’ 같은 수식어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한 시대의 목소리였다. 한 세대를 상징하던 목소리는, 그 세대를 대변하며 음악의 세월을 보내왔고 결국 한국 현대사의 목소리가 됐다. 개인과 시민의 마음이 그대로 담긴 목소리가 됐다.
선정위원 김작가
아티스트양희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