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분야 – 공로상
데블스
데블스, 검은 악마들
‘엄혹했다’라고 기억되는 1970년대 그룹 사운드(이하 ‘밴드’)의 이름을 감히 데블스라고 지은 존재가 있었다. 이들은 미8군 무대에서 잘 나가다가 1960년대 중후반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한국 록 1세대의 엘리트들도 아니고, 이들과 같은 세대로 방송과 언론의 주목을 많이 받은 통기타 포크 군단도 아니었다.
이 악마들은 그 틈새를 비집고 당대 가장 힙했던 미국 흑인의 대중음악인 소울을 밴드 형태로 온전하게 구현한 존재로 굳건한 지위를 차지했다. 게다가 밴드 스스로 자작곡을 창작하는 것이 정립되지 않던 무렵 이들은 다수의 자작곡을 창작했고 1971년부터 1977년까지 정규 앨범만 세 종 남겼다.
‘100대 명반’ 류의 리스트에 이들의 작품이 선정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후대의 평론가들은 데블스의 음악에 지성적인 면모가 적고 통속적 면모가 강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집가 혹은 감식가 일부에서 평가는 역전된 지 오래다. 2003, 2009, 2017년 세 차례에 걸쳐서 음반이 재발매된 것, 그리고 2008년 영화 [고고 70]에서 이들의 활동이 픽션으로 가공된 것은 이들에 대한 작은 트리뷰트다.
밴드 활동과 병행하여 1970년대 말-1980년대 초 이은하, 윤승희, 정난이 등의 훵크·디스코 디바들의 혁신적 사운드에도 데블스. 특히 리더인 고(故) 김명길의 손길이 미쳤다. 1집에 참여한 뒤 밴드를 나간 연석원은 다른 밴드를 거친 뒤 1980년대 이후 내로라 하는 편곡자(요즘 말로 프로듀서)의 한 명으로 활동했다. 이들의 혁신이 없었으면 ‘R&B 강국 코리아’도 없지 않았을까.
데블스는 주변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자기의 길만 걸어가던 고집스러운 ‘음악 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멋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존재였다. 1974년이라는 시점에 음반(2집) 커버에 등 뒤를 드러내고 삐딱하게 서 있는 모습으로 철창에 갇힌 이미지를 담는 게 가능했을지 신기할 정도로 멋지다,
그런 멋이 퇴색했는지 영원한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겨야 할 문제다. 그렇지만 독재정권에 대한 반항이 명문대 대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의 특권만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한때 밴드의 이름을 ‘친구들’로 바꾸라는 ‘탄압’을 견뎌낸 이들의 강인한 음악은 ‘그리운 건 너’로 남아 있고, 남아 있을 것이다.
선정위원 신현준
특별분야 – 선정위원회 특별상
한경록
특별분야 – 선정위원회 특별상
한국재즈수비대
최근 우리 재즈계는 암담했다. 팬데믹 이후 전국의 재즈클럽이 불을 끄거나 풍전등화로 몰렸다. 정부 방역 지침이 불리하게 적용된 대중음악계 내에서도 가장 짙은 어둠은 재즈 쪽에 드리워 갔다.
현실이 이럴진대 한국재즈수비대라니…. 간판부터 돈키호테풍이다. 누구인고 했더니 돈 많은 대기업도, 고매한 평론가도, 능란한 기획자도 아니다. 젊은 베이시스트와 피아니스트. 주축은 달랑 둘이다. 차라리 보호 대상에 더 가까워 보이는 이 몽상가 집단은 방황하던 젊은 날 자신들에게 삶의 의미를 찾아줬던 재즈 클럽들이 근년에 줄줄이 문 닫는 것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마땅한 구원자를 기다릴 시간이 없다. 일단 우리끼리 시작해보자.’
예상된 막무가내였다. 급한 대로 사비 털고 인맥을 가동했다. 젊은 연주자 총 41명을 모았다. 여덟 곡을 손수 작사 작곡 했다. 곡마다 가사와 음악적 분위기로 각 클럽에 헌정했다. 전국의 재즈 클럽 운영자와 연주자를 인터뷰하는 유튜브 콘텐츠 시리즈도 만들었다. 발품 팔아 기록한 재즈클럽 버전의 대동여지도는 앨범 표지에 박아 넣었다. 크라우드펀딩은 200% 이상 달성됐고 콘텐츠 조회수는 회당 수천 회를 상회했다. 막무가내가 예상을 넘었다.
오늘도 이 땅 위 수많은 재즈의 순간이 우리를 기다린다. 서울에서, 부산에서, 대구에서, 안산에서, 제주에서 음표는 찰나의 시공간에 매달려 위태로운 별빛으로 명멸한다.
찌릿, 찌릿. 작은 전류를 느낀다. 너무 작은 귀뚜라미 울음이 들린다. 당연하고 평범해 그만 모두 잊고 있던 마법 주문이 작고 큰 소리로….
‘우린 모두 재즈클럽에서 시작되었지!’
선정위원 임희윤